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220] 피의 화염을 떠나 죄의 허물을 벗고

이 시간 주요기사

뉴스 > 연재소설

세상에 처음 태어났을 때처럼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11-26 06:20:22

나는 코트를 벗어 발밑에 던졌다. 그래도 확확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마가 뜨끈뜨끈했다. 나를 휘감은 것들이 거추장스러웠다.

그제야 보였다. 유리의 피가 나를 물들이고 있었다. 손에, 얼굴에, 목덜미에 벌겋게 들러붙어 있던 피가 여기저기 검게 말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점점 면적을 넓혀 가며 타오르는 화마처럼 통째로 나를 집어삼킬 기세였다. 나는 카디건을 머리 위로 훌렁 벗어 던졌다. 셔츠의 단추를 풀고 소매를 빼 내던졌다. 벌떡 일어나 서둘러 허리띠를 풀었다.

한강을 걷고 뛰고 달리던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흘끔흘끔, 내 몸 위로 화살처럼 쏟아졌다. 어머나! 화들짝! 몇몇 웅성거림이 찬 공기를 타고 퍼졌다. 누군가는 통화를 하고 누군가는 신고하는 것 같았다. 누군가는 스마트폰 카메라로 나를 찍었다. 내일이면 나는 유튜브의 스타가 될지도 몰랐다.

카메라를 향해 손가락으로 브이라도 그리며 웃어 보여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여유가 내겐 없었다. 아무리 옷을 벗어도 내 살갗에 들러붙어 있는 유리의 피가 뜨거워서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내 몸을 새까맣게 태워 버릴 것처럼 맹렬히 타오르는 피의 화염 속에서 나는 도망쳐야 했다.

“아니. 젊은 사람이 정신 줄을 놨나. 이 사람아, 추운 데서 이러면 못써.”

흘끗거리던 무리 중 나이 지긋한 노년의 남자가 다가와 내 팔을 잡았다.

“날 만지지 마!”

내가 그를 뿌리치며 완강하게 소리쳤다. 내게서 밀쳐진 노인은 넘어질 듯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쳤지만 주위 사람들이 잡아 준 덕에 넘어지지는 않았다. 그 후로는 누구도 내게 가까이 다가서지 못했다.

나는 신발을 벗고 양말도 벗어 집어 던졌다. 두 발을 하나씩 바짓가랑이에서 성급히 빼냈다. 바지가 홀랑 뒤집어졌다. 소복하게 내 발밑에 벗어ㅠ놓은 옷들이 죄의 허물처럼 쌓여 갔다. 옷을 벗어도 몸은 참을 수 없이 뜨거웠다. 빨갛게 달구어진 심장이 가슴을 찢고 튀어 나갈 것 같았다.

나는 엉덩이를 가리고 있던 팬티까지 망설임 없이 내렸다. 아앗! 여자들이 놀라 외치고 저런, 저런, 사내들이 혀를 찼다. 그러나 시들어 버린 육체의 뿌리 같은 건 부끄럽지 않았다. 나의 등과 어깨가, 허리와 엉덩이가, 두 다리와 맨발이, 가로등 불빛에 날것 그대로 허옇게 드러났다. 세상에 태어날 때처럼 벌거벗은 나의 알몸은, 다만 가여웠다. 하지만 나는 나를 안아 줄 수 없었다. 그 누구도 나를 안을 수 없었다.

나는 사람들을 헤치고 달렸다. 운전실에 앉아 달리던 지하터널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 가로등이 휙휙 지나갔다. 100미터를 13초에 달리던 소년 시절처럼, 나는 겨울 바람 한가운데를 내달렸다. 아무도 제지할 수 없는 속도로, 누를 수 없는 힘으로 달렸다.

차가운 기온이, 시린 바람이 내 알몸을 할퀴며 채찍을 휘둘렀다. 사람들의 경멸 어린 눈초리가 한강의 칼바람만큼이나 시리게 내 등에 꽂혔다. 유리 조각을 밟았는지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까지 통증이 타고 올라왔다. 그러나 그 고통이 알 수 없는 안도감으로 전이되어 나를 부르르 떨게 했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김규나 필진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