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80] 그리움은 기억의 소화불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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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이 눈처럼 쌓이는 새벽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4-29 06:30:10

“강무훤 씨.”

정하운이 복도와 방의 경계에 서서 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새벽도 한창 깊은 시간이었다. 에바의 이야기에 빠져 있던 나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노크를 했는데 내가 못 들었다고 정하운이 말했다.

“눈이 많이 내렸어요.”

바람에 흔들리는 유리창 너머로 한 뼘이나 됨직한 눈이 쌓인 게 보였다.

“에바는 작가가 되었어도 좋았을 거예요.”

정하운이 문을 반쯤 열어둔 채 방으로 들어와 벽난로 앞에 서며 말했다. 결정을 독촉하려고 온 건 아닌 듯했다. 나는 노트를 무릎 위에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하엘에 대해 물을까 하다 그만두었다. 왜 에바의 노트를 읽으라고 했는지도 지금은 알고 싶지 않았다. 에바는 나와 같은 증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한 가지, 꼭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어쩌면 하운도 그 이야길 해주러 올라온 것일지도 몰랐다.

“최 박사님과 에바처럼, 우리도 늙겠죠. 우리가 그분들의 젊은 시절을 상상하기 어려운 것처럼, 미래의 누군가도 지금 우리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을 거예요.”

정하운이 노트를 흘낏 보며 말했다. 그때까지 살아있다면, 하고 나는 생각했다.

“오랫동안 무엇인가를 그리워해 본 적 있어요?”

정하운이 두 손바닥을 넓게 펴고 가까이 불을 쬐며 물었다.

“그리움은 어떤 시간을 반복해서 되새김질하는 거예요. 기억의 소화불량이죠.”

나는 한 번도 그리움을 느껴본 적 없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냉소적으로 말했다.

“반복하고 익숙해지면 눈과 마음을 빼앗기죠. 이성적인 사고 능력은 마비돼요. 못생긴 사람도 예뻐 보이고, 처음엔 쟤 왜 저래? 하다가 사랑에 빠지고,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되뇌다 보면 잊었던 사람이 떠오르고 마음이 찌릿 아프잖아요?”

“그래요? 난 의미가 모호해지거나 지루해지던데요. 기차, 기차, 기차 하고 반복해 봐요. 어느 순간 차기, 차기, 차기가 되잖아요. 내가 뭘 말하고 있었던가, 잊게 되잖아요.”

나는 그리워하지 않으려 애쓰며 살았다. 그리움은 사람을 나약하게 한다. 남자는 울면 안 된다고 배우며 자란 것처럼 그리움 역시 드러내면 안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돌아보면 어머니가 그리웠다. 아버지도 그리웠다. 헤어지고 보니 아내도 그리웠고 아이들이 말할 수 없이 그리웠다. 정하운을 볼 때마다 그 아이 마리아도….

내가 정하운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정말 없어?’

그녀의 눈빛이 내 속을 빤히 들여다보며 묻고 있었다. 그녀가 내 앞으로 다가와 불쑥 손을 내밀었다. 나는 긴장한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의자에 앉은 채 허리를 꼿꼿이 펴고 그녀를 무심한 듯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내게는 관심이 없다는 듯 그녀가 노트를 눈으로 가리켰다. 실망스러운 마음을 감추고 나는 노트를 건넸다. 정하운이 노트를 주르륵, 훑더니 어느 한 페이지를 펼쳤다. 그러고는 맞은편 의자에 앉아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밖에는 다시 가느다란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벽난로의 불길은 벌겋게 타올랐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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