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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상처가 고스란히 남은 강원도 최북단. 하지만 이곳은 더 이상 ‘멈춰 선 역사’의 공간이 아니다. 전쟁의 흔적이 가득한 DMZ(비무장지대)는 이제 평화와 생명의 땅으로 서서히 변모하고 있다. 강원도 고성과 양구를 따라가며, 우리는 냉전의 잔해 속에서 움트는 평화의 가능성을 마주했다.
분단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양구와 고성의 사람들은 이곳에서 평범한 일상을 이어간다. 차가운 겨울에도, 황량한 철책 너머에도, 사람들은 평화를 꿈꾼다. 그 여정은 단순한 여행이 아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이자 함께 만들어가야 할 미래다. DMZ는 여전히 ‘금단의 땅’이지만, 동시에 평화의 땅으로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변하고 있다.
6·25 75주년을 맞아 기자가 직접찾은 강원도 고성은 휴전선과 맞닿아 있는 최북단 지역이다. 고성 읍내를 지나 북쪽으로 향할수록 군용 차량과 검문소가 자주 눈에 띈다. 통일전망대로 가는 길은 간단하지 않다. 통일안보공원에서 출입 신청서를 작성하고, 안보 교육 영상을 시청한 후 민통선 검문소를 통과해야만 갈 수 있다. 번거로운 절차지만, 이 모든 과정이 이곳이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땅’이면서도 분단의 현실을 상기시킨다.
통일전망대에 오르자 한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숨이 막힐 정도다. 펄럭이는 태극기 너머로 북방한계선·남방한계선·아련히 보이는 금강산 봉우리들이 분단의 현실을 실감케 한다. 전망대 바로 앞, 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351고지는 당시의 참혹했던 기억을 묵묵히 전한다. 실향민 부모님이 보고싶어 고성 통일전망대를 여러 차례 찾았다고 밝힌 관람객은 “그냥 전망대에 올라 금강산을 바라보며 말없이 한참을 서 있는 경우가 많다”며 “풍경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묘한 감정을 주는데, 분단의 땅에 살고 있다는 걸 가장 깊이 느끼게 해준다”고 밝혔다.
금강산 봉우리를 찾고 있던 중년의 관람객도 “망원경 너머로 보이는 해금강의 기암괴석, 그리고 금강산의 봉우리들은 통일에 대한 염원을 더욱 절실하게 만든다”며 “특히 철책 아래로 길게 뻗은 동해선 도로와 철로는 남북을 잇는 통로였던 과거의 기억을 환기하며, 언젠가 다시 열릴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강조했다.
통일전망대에서 차로 10분 거리, DMZ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DMZ박물관은 냉전의 비극과 자연의 보고인 DMZ의 두 얼굴을 담은 공간이 드러난다. 2009년 개관한 이곳은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1층, 평화의 미래를 조망하는 2층으로 구성되어 분단의 역사와 통일 염원을 동시에 체험할 수 있다.
지뢰지대 재현, 참전병의 편지, 대북방송 확성기 등 전시물은 관람객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DMZ의 역사와 생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이곳은, 단순한 전쟁 박물관이 아니다. 박물관 2층 전시실은 ‘축복받지 못한 탄생 DMZ’, ‘냉전의 유산은 이어진다’, ‘그러나 DMZ는 살아 있다’라는 주제로, DMZ가 품은 비극과 희망을 함께 보여준다.
전시를 따라가다 보면, 전쟁으로 생겨난 DMZ가 어쩌면 가장 순수한 자연의 보고가 되었음을 알게 된다. 3층에는 방문객들의 평화 염원을 담은 엽서로 만든 ‘평화의 나무가 자라는 DMZ’가 있다. 이곳에서 만난 한 관람객은 “비극적인 공간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평화의 의미를 더 깊이 새기게 된다”며 “DMZ는 전쟁의 상징이면서도 평화의 상징이 됐다”고 밝혔다.
강원도 북쪽, 양구군 해안면. 낯선 행성에 온 듯한 풍경이 펼쳐지는 이곳은 ‘펀치볼’이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길이 약 3km의 돌산령터널을 지나면, 회색빛 고봉으로 둘러싸인 드넓은 벌판과 그 한가운데 자리 잡은 작은 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다른 차원의 세계로 들어서는 듯한 이 터널은 여행자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양구는 단순한 접경지역이 아니다. 박수근 화백의 삶과 작품을 전시한 박수근미술관, 한국 대표 시인과 철학자들의 사유를 담은 양구 인문학박물관, 국토의 중심임을 기념하는 휘모리탑과 국토정중앙천문대까지, 역사·자연·문화를 아우르는 종합적 가치가 살아 숨쉬는 곳이다.
펀치볼, 본래 ‘화채그릇’이라는 뜻처럼 둥글고 넓은 분지 형태를 갖추고 있다. 남북 길이 약 12km, 둘레 33km의 이 지역은 고립된 지형으로, 주민 약 1200명이 서로 알고 지낼 정도로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겉으로 보기엔 평화롭지만, 이곳은 6·25전쟁 당시 치열한 격전지였다는 전언이다. 펀치볼 전투·도솔산 전투·가칠봉 전투 등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고, 지금도 곳곳에 ‘지뢰’ 표지판과 전적비가 남아 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전한다.
펀치볼의 해안(亥安)이라는 지명에는 흥미로운 전설이 담겨 있다. 예로부터 이곳은 뱀이 많아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고, 어느 스님의 조언에 따라 돼지를 기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평안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돼지가 편안한 곳’이라는 뜻의 해안면은 그래서 ‘돼지마을’로도 불린다. 지금은 돼지의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복지회관 외벽의 멧돼지 조각상과 마을 하천가에 서 있는 돼지 조형물이 옛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해안면은 고랭지 채소, 특히 무와 시래기의 주산지로 유명하다. 겨울철에도 마을 곳곳엔 시래기를 말리는 삼각 천막이 가득하고, 비닐하우스마다 시래기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들판엔 무청이 도려진 무들이 촘촘히 박혀 겨울의 정취를 더한다.
최근엔 온난화의 영향으로 벼농사도 안정적으로 가능해졌고, 과수와 인삼 재배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산 중턱까지 햇빛가리개로 덮인 인삼밭이 이어지는 모습은 이곳 농가의 변화를 실감케 하지만, 풍경의 조화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펀치볼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는 을지전망대다. 해발 1049m 고지에 세워진 이곳은 남북이 맞닿은 최전선으로, 북한 감시초소와의 거리는 불과 780m에 불과하다. 삼중 철책 너머로 펼쳐진 DMZ의 원시림은 아름답지만 긴장의 기운이 여전히 감돈다. 남북의 심리전이 한창이던 시절, 을지전망대 근처에서는 미스코리아 수영복 심사와 북한 여군들의 목욕 장면이 관측되는 등 다소 기묘한 대치가 이어지기도 했다.
을지전망대에서 북녘을 향한 사진 촬영은 지금도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눈으로 보고 마음에 담는 수밖에 없다. 금강산의 봉우리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이고, 광활한 북한의 산세가 웅장하게 펼쳐진다. 양구는 평화와 분단의 역사를 함께 품은 공간이다.
양구통일관에서 출입 신청을 하면 을지전망대, 제4땅굴, 펀치볼을 둘러볼 수 있으며, 전쟁의 흔적을 넘어 평화를 체험하는 교육의 장으로 기능하고 있다. 특히 제4땅굴은 북한의 집요한 침투 시도를 생생히 느낄 수 있는 상징적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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