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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이슬람혁명으로 쫓겨난 이란 팔레비 왕조의 마지막 왕세자가 현 신정체제의 종식과 “새 나라 건설”을 외치고 나섰다. 주요 외신과 유튜브에 공개된 바에 따르면 레자 팔레비(64)는 23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알리 국제사회의 협조를 호소하며 현 상황을 “우리의 베를린장벽 붕괴 순간”이라고 비유했다. 그는 이날 “자신을 동포에 바쳐 평화의 길을 이끌고자 이 자리에 섰다”며 “함께 새로운 이란을 건설하자”고 촉구했다. 또 “핵시설 파괴만으로 평화가 오지 않는다”며 “이란 내 민주적 전환만이 이런 목표를 달성해 지속가능하게 할 수 있다”고 짚었다.
레자는 구체적인 증거 제시 없이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 본인 및 가족과 주요 고위층이 탈출 준비 중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향후 체제전환을 이끌거나 새로운 샤(국왕)가 될 것인가’ 질문엔 “정치적 권력을 추구하진 않는다”고 답했으나, 자신의 팀이 미래 경제계획을 수립 중이며 반체제 활동가·인사들을 모아 국민단결회의 추진 희망을 밝혔다. 기업인·전문가·학자들, 현 정권을 이탈하게 될 이란 행정·군 관계자가 함께 할 플랫폼이라고 소개했다.
레자의 조부와 부친이 재위하던 시절 이란은 서구형 근대화에 매진했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엔 철저한 친미국가였다, 18세 부터 미 공군기지에서 훈련 중이던 레자는 이듬해 1979년 혁명으로 왕정이 전복되자 미국 망명생활을 이어갔으며 신정 종식과 세속주의(정교분리) 민주정 수립을 주장해 왔다.
신뢰도 높은 네델란드 라이덴대 기반 ‘가마안’(GAMAAN·이란여론조사)의 2022년 12월 조사에서 15만8000여명의 응답자 중 81%가 현 체제에 거부 의사를 표했고 이 중 약 22%가 입헌군주제와 팔라비 왕정에 호감을 보였다. 레자에 대해 ‘전환기 지도자로 적절하다’ 응답 비율은 32~40%였다(공화제 선호 응답 28~32%). 최근 이란 내 시위에서 젊은이들이 “우리의 선택은 팔레비” 등 구호를 외친 사례, 세계인이 드나드는 게시판 레딧에 레자 지지 댓글이 올라오긴 하지만 국내 이란인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준은 아니다.
요며칠 서방 세계 주요 외신들이 일제히 레자를 ‘전환 정부’ 지도자 유력 후보로 언급하고 있으나, 전문가들은 그의 미국·이스라엘 등 외부 조력에 의존한 이미지가 정통성과 이란 내부 자발적 호응도를 떨어뜨릴 가능성을 유려한다. 예를 들어 19일자 파이낸셜타임스(FT)에선 “국내 지지층이 적고 현실 정치와 동떨어져 있다”며 레자의 한계를 지적한다. “망명 중인 중산층·왕정 지지자들 사이에선 존경받지만 이란 내부 정치 현실이나 정서와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레자는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와 파라의 장남이다. 팔레비 왕조 자체가 시아파 이슬람을 공식 견지하면서도 서구식 정교분리를 추진한 혼종 상태였다. 모하마드 레자 재위 시절 이슬람 성직자층의 지배력을 약화시키려다가 거센 반발에 부딪혀 왕조 몰락의 한 원인이 됐다. 2018년 2월16일 미국의소리(VOA) 인터뷰에서 레자는 “개인적으론 종교적 신념을 가졌지만 국가란 정교분리 원칙에 따라 운영돼야 한다고 믿는다. 종교가 권력에 종속되거나 도구화되는 순간 종교의 진정성도 훼손된다”며 이슬람 신정체제를 비판했다.
아울러 ‘종교의 자유’를 이란 미래의 핵심 가치 중 하나로 들며 기독교·유대교·조로아스터교 등 모든 소수 종교가 공존하는 자유로운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자유주의의 핵심을 찌른 대목이다. 종교의 자유야말로 개인의 양심·내면의 독립성을 보장받는 첫 걸음이기 때문이다. 특히 유대교에 호의적인 레자는 2023년 4월 이스라엘 방문 시 현지 매체들 인터뷰에서 이스라엘을 “이란의 잠재적 동반자”로 표현했다. ‘이스라엘에게 죽음을’이 국시인 현 체제와 대척점인 입장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레자의 사생활은 단정한 편이다. 이란계 미국인 변호사와 1986년 결혼해 3녀를 뒀으며 본인과 가족 아무도 추문에 휘말린 적이 없다. 간신히 동결을 피한 왕실 해외 자산 일부, 망명 공동체로부터의 후원 및 강연·집필 등으로 생계를 유지해 왔다는 점에서 과거 왕정 시절의 호사와 비교되곤 한다. 23일 파리 회견 때 레자가 “국민의 고통을 기억하며 살아간다”고 털어놓자, 온라인 게시판 등 비공식 채널엔 “외국에서 평온히 살면서 혁명을 말한다”며 꼬집는 시각도 등장했다.
팔레비 왕실은 시아파 성직자층과 척을 지면서 공공의 적이 됐으며 혁명 성공 전후 레자의 모친인 파라 왕비가 집중적으로 도마에 올랐다. 그녀는 공공의료·교육 지원 사업도 펼쳤으나 테헤란 현대미술관 설립, 미술품 구입, 슈라즈 예술축제 등 문화·예술 활동에 어마어마한 돈을 쓰면서 원성을 샀다. 1971년 페르세폴리스 2500주년 기념행사가 민심 이반의 결정적 계기로 꼽힌다. 페르시아 문명 유적지인 사막 한가운데 궁전과 호텔을 지어 외국 정상들을 초대해 최고급 파티를 벌였다. 행사 비용 약 2억 달러(약 3000억 원)는 오늘날 20배를 곱한 수치에 해당할 금액이었다.
모하마드 레자 또한 자서전 ‘역사에 답하다’(1980)에서 뼈아픈 반성을 토로했으며 파라 역시 1990년 후반~2000년대 초반 프랑스와 미국 매체들 인터뷰 때마다 유감과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이런 점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음을 레자도 근년 다양한 인터뷰에서 언급했다. 다만 이슬람혁명 후 삶이 더 나아지지 못했고 오히려 더 힘들어졌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진 가운데 근년 색다른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2023년 2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기반의 디지털 매체 ‘ZH 매거진’에선 파라를 “예술과 문화의 여왕”으로 평가하며 1960~70년대 이란 예술계 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고 기술했다. 학술서로선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출간된 ‘팔라비 이란 시대의 문화 정치’(2023년 9월)가 있다. “문화정책을 통한 정치적 소프트 파워 발신”의 의미를 살핀 이 책에서 파라의 존재감이 부각된다. ‘사치의 아이콘’을 넘어 ‘문화유산을 가꾼 인물’로 재해석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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