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쓰는 역사 [49] 충성심과 절개의 상징이 된 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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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한 꽃향기는 난초꽃의 미덕 중 하나

스카이데일리 기자페이지 + 입력 2025-02-17 10:30:20

▲ 어렵게 핀 난초꽃 한 송이의 향기는 열흘이 지나도록 실내에 가득 번진다. 윤상구 사진작가

“꽃이 되려거든 난초가 되고/ 나무가 되려거든 솔이 되려무나/ 난초는 그윽하여 향풍이 멀리 가고/ 솔은 추워도 그 모습 아니 바꾸네.”

시선(詩仙)으로 불리는 중국 당나라 때 시인 이백이 읊은 시이다. 이 시에서 보면 이백은 난초를 꽃 중 최고로 여긴 듯하다.

난초는 매화·국화·대나무와 더불어 ‘군자’ 반열에까지 올랐다. 이 네 식물의 공통된 특징은 악조건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꽃을 피우거나 꼿꼿한 자태를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조와 절개를 중요하게 여겼던 유교 사회에서는 이 사군자를 가까이 두고 시로, 그림으로 표현하며 자신도 그런 고아함과 품격을 지닐 수 있도록 소망했다.

“꽃이 되려거든 난초가 되려무나”

▲ 난초는 국화과와 콩과 다음으로 그 범주가 넓고 품종도 다양하다. 윤상구 사진작가

난초는 의외로 널리 퍼져 있는 흔한 식물이다. 국화과와 콩과 다음으로 그 범주가 넓고 품종도 다양하다. 전 세계에 450속 1만 5000여 종이 분포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39속 84종이 자라고 있다. 쉽게 동양란과 서양란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대개 난초라 하면 잎이 가늘고 크기가 작은 동양란을 일컫는다.

동양란의 미덕 중 하나는 은은한 꽃향기다. 난초꽃은 화려하고 탐스럽지는 않지만 어렵게 핀 한 송이의 향기는 열흘이 지나도록 실내 가득 번진다. 인적이 드문 깊은 산중에 홀로 피어나도 변함없이 향을 내뿜는다는 점 또한 지조와 절개를 지닌 선비나 여인에 비유된다.

중국 초나라의 시인 굴원 이후 난초는 충성심과 절개의 상징으로 굳어졌다. 굴원은 ‘이소’라는 장편 서사시에 “나는 이미 넓은 밭에 난을 기르고 가을 난초를 꿰어서 노리개 만들려고 꽃과 잎이 무성해지기를 기다렸으나 꽃향기 잡초에 덮여 슬퍼라”고 썼다. 자신이 난초를 좋아하여 넓은 지역에 가득 심었음을 여기 밝혀 놓았다.

불우했지만 난초를 사랑했던 굴원

‘이소’는 정칙(正則)이라는 인물의 1인칭 시점으로 묘사되고 있다. 정칙은 주군을 위해서 열심히 일했지만 간신들의 모함으로 주군과 갈등이 생긴다. 그가 슬픔·분노·한탄 속에서 방랑하며 신화적 환상 세계를 노래한 내용을 담은 이 작품은 굴원 자신의 자전적 작품이라 여겨지고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이소(離騷)’는 ‘근심을 만난다’는 뜻인데, 이 작품은 ‘사기’뿐만 아니라 중국 고전 시가 작품집 ‘초사(楚辭)’에도 실려 있다.

전국시대 초나라에서 태어난 굴원은 회왕의 신임을 받아 20대에 좌도라는 중책을 맡았다. 그러나 그를 시기한 대신들의 중상모략으로 면직당하고 회왕과도 멀어졌다. ‘사기’의 ‘굴원전’에는 굴원이 초나라 궁정에서 쫓겨나 유배 생활하던 중 세상에 대한 실망감을 담아 ‘이소’를 지었다고 쓰여 있다.

강남으로 유배된 굴원은 중국 후난성 북동부에 있는 동정호에 이르렀다. 머리를 풀어 헤치고 호숫가를 헤매는 굴원을 보고 어부가 삼려대부를 지낸 사람이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굴원은 “온 세상이 더러운데 나 홀로 깨끗하고, 모든 사람이 술에 취했는데 나 홀로 취하지 않아 이렇게 되었소”라고 탄식 섞인 답변을 했다.

그러자 어부가 “성인은 만사에 엉키거나 얽매이지 않고 능히 세속과 어울려 살아갈 수 있다 했습니다. 세인이 모두 탁하다면 왜 그대는 썩는 진창물을 더욱 어지럽게 하고 탁한 물결을 일게 하지 않으십니까? 또한 뭇사람이 모두 취해 혼몽하다면 왜 그대는 어울려 술지게미를 먹고 그 찌꺼기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십니까? 무슨 까닭에 스스로 쫓겨나게 만드셨습니까?”라고 다시 물었다.

“물고기 밥이 될지언정”

▲ 중국 초나라의 시인 굴원 이후 난초는 충성심과 절개의 상징으로 굳어졌다. 윤상구 사진작가

이에 굴원은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관의 먼지를 털어 쓰고 몸을 씻은 사람은 옷의 먼지를 털고 입는다고 했소. 그러니 어느 누가 청결한 몸에 더러운 먼지를 그대로 받들고 있겠소. 차라리 장강에 몸을 던져 물고기 밥이 될지언정 더러운 세상에 몸을 더럽히지는 않겠소”라고 말한 후 다시 길을 떠났다. 이는 굴원의 ‘어부사’에 실린 사연이다.

‘이소’에는 “아! 저 신하의 무리 안락만 추구하니/ 가는 길은 험하고 좁고 어둡네/ 어찌 나 자신의 재앙을 겁내리오/ 임금의 수레 무너져 엎어질까 두렵구나”라며 나라를 걱정한 내용도 실려 있다.

회왕은 굴원의 간언을 듣지 않고 제나라와 진나라 사이에서 연합과 배신을 거듭하는 등 외교적 실책을 저지르다가 진나라에서 객사했다. 경양왕이 새로운 왕이 되었지만 이미 초나라는 헤어날 수 없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절망과 비탄에 빠진 굴원은 스스로 돌을 품고 미뤄강(멱라강)에 몸을 던졌다.

말은 쉽지만 난초처럼 고아한 품격과 향기를 유지하며 살기는 쉽지 않다. 스스로 그 경지에 이르기도 어렵지만 세상은 깨끗한 사람을 그냥 놔두지 않고 진흙탕으로 끌고 들어간다. 이런 상황에서 고결함을 유지하려면 굴원처럼 세상을 등지는 길밖에 없는 걸까?

“창랑의 물이 맑으면 그 물로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거기에 나의 발을 씻으리라”는 ‘어부사’ 구절의 의미를 새삼 깊이 생각하게 된다.

[글 황인희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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