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무’의 뜻이 바뀐 게 2015년 6월15일이다. 그전까지는 ‘너무 힘들다’ ‘너무 밉다’처럼 ‘일정한 정도나 한계에 지나치게’라는 뜻풀이에 따라 부정적인 상황에서 쓰이는 말이었다. 이에 ‘너무 고맙다’ ‘너무 예쁘다’는 적절치 않은 표현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긍정적인 상황에서도 여전히 ‘너무’를 애용했고 고지식한 이들은 이를 일일이 지적질하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이처럼 제도가 현실 쓰임을 따라잡지 못하자 결국 국립국어원도 ‘너무’의 뜻을 ‘일정한 정도나 한계를 훨씬 넘어선 상태’로 변경하게 되었다. ‘너무 좋다’ ‘너무 예쁘다’도 옳은 표현이 된 것이다.
정치 이슈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요즘 사람들을 만나기가 두렵다. 내 생각은 ‘너무’ 옳고 누가 봐도 반대할 여지가 전혀 없고 만약 반대한다면 그 사람이 ‘너무’ 이상한 사람이라는 논리가 판을 치기 때문이다. 만남의 자리를 불편하게 하는 이런 너무한 주장들에는 대처할 방법이 없다. 반박이 곧 말싸움으로 번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너무한 주장을 앉아서 들어 주기에는 내 인내심에 한계가 따른다.
올바름의 기준은 계속 바뀐다. 역사는 올바름을 명분으로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타자화하고 제압하는 일을 반복해 왔다. 그 과정에서 ‘사태’가 ‘민주화운동’으로, ‘혁명’이 ‘쿠데타’로 명칭이 바뀌었다. 누가 아는가. 이들 명칭이 또다시 바뀔지.
올바름에 ‘너무 올바른’ 것은 없다. 올바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내 것 같지만 알게 모르게 우리는 대세에 휘둘리고 언론에 포섭당하며 지인의 말에 넘어간다. 단 하나 올바른 게 있다면 맹백해 보이는 올바름조차 의심하고 그 판단을 유보하는 일일 것이다.

다음은 책에서 발췌한 올바름에 대한 생각들이다.
“‘올바른 것을 행한다’는 명분 아래, 그에 대한 손쉬운 복종 아래, 눈앞의 타인에 공감하고 그를 사랑할 수 있는 기회가 수없이 사라졌다. (…) 친절은 상대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순간에 대한 묘사다. 달리 말해 환대는 타인을 향한 내 안의 ‘올바름의 기준’이 무너진 폐허에서 피어오른다. 진정으로 친절하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무너져 있어야 하고, 열려 있어야 한다.”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정지우)
“제가 PC(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를 반대하는 진짜 이유는 효과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목표를 반드시 성취하고 싶지만 PC는 적합한 방법이 아니라고 보는 거죠. 인간이 저지르는 가장 커다란 실패는 효과적인 것보다 올바른 것을 선호하는 것입니다. PC가 얼마나 효과적일지는 생각하지 않고 그저 얼마나 옳은지에만 집착합니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 스티브 프라이)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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